‘약은 늘었는데 건강은 더 나빠졌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다제복용(Polypharmacy)’ 문제가 일상적 의료 이슈를 넘어 공중보건 위험으로 부상하고 있다. 다제복용은 통상 여러 질환으로 인해 동시에 다수의 약물을 복용하는 상태를 말하며, 단순히 ‘약이 많다’는 차원을 넘어 약물 상호작용, 중복처방, 부작용 누적을 통해 낙상·섬망·저혈압·저혈당·신장손상 등 중대한 사건을 유발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고령층에서 다제복용은 질환의 중증도와 맞물려 입원·응급실 방문·사망 위험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리는 요인‘이라며 정기적인 약물 점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급격히 확산되는 다제복용, ‘질병 관리’가 ‘약물 위험’으로 되돌아온다
노인은 만성질환 유병률이 높고, 여러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진료과·의료기관·약국이 분절된 환경에서 처방이 누적되면, 환자 스스로도 어떤 약을 왜 먹는지, 서로 충돌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에 건강기능식품, 한약, 일반의약품(진통제·감기약·수면보조제 등)까지 더해지면 실제 복용 약의 ‘총량’은 의료기록보다 더 커진다.
의료현장에서는 ▲동일 성분의 중복 처방 ▲유사 계열 약물의 불필요한 병용 ▲어지럼·졸림을 유발하는 약의 중첩 ▲위장약·진통제·항히스타민제의 장기복용처럼 ‘관성 처방’이 이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수면제·항불안제·항정신병약·항콜린성 약물 등은 노인에서 인지저하·섬망·낙상 위험을 높일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같은 용량도 노인에겐 다르다’…대사·배설능력 저하가 위험 키운다
다제복용이 위험해지는 핵심 이유는 노화로 인한 약물 대사·배설능력 저하다. 간 기능과 간혈류가 감소하면 약물 대사가 늦어지고, 신장 기능(사구체 여과율)이 떨어지면 약물이 체내에 더 오래 남아 혈중농도가 상승할 수 있다. 근육량 감소와 체지방 비율 변화는 약물 분포에도 영향을 줘, 동일한 복용량이라도 노인에게는 더 강한 효과·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응급 상황으로 직결되기도 한다. 예컨대 혈압약·이뇨제·전립선비대 치료제 등이 겹치면 기립성 저혈압과 실신 위험이 올라가 낙상·골절로 이어질 수 있고, 당뇨약·인슐린은 저혈당 위험이 커진다. 항응고제와 일부 진통소염제(NSAIDs) 병용은 출혈 위험을 높이며, 신장에 부담을 주는 약물이 겹치면 급성 신손상으로 입원하는 경우도 생긴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노인병 전문의는 ‘고령층에서 다제복용은 단순히 약 개수 문제가 아니라 약동학·약력학 변화, 장기 기능 저하, 인지기능 변화가 결합된 ‘복합 위험’‘이라며 ‘응급실로 오는 어지럼, 의식저하, 낙상 중 상당수가 약물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해법은 ‘약을 줄이는 기술’…브라운백 리뷰부터 시작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권하는 첫 단계는 약물 리스트 점검(브라운백 리뷰, Brown Bag Review)이다. 환자가 집에서 복용 중인 처방약·일반약·건기식·한약을 모두 봉투에 담아 의료진(의사·약사)에게 가져와 확인하는 방식으로, 차트에 없는 ‘숨은 약’을 찾아내는 데 효과적이다.
실천 가이드: 다제복용 점검, 이렇게 하면 된다
- 복용 약 ‘전부’를 한 번에 모으기
– 처방약(여러 병원 포함), 약국에서 산 일반약, 파스·연고, 건강기능식품, 한약까지 포함
– ‘필요할 때만’ 먹는 진통제·수면제도 포함 - 약물 리스트(약 이름·용량·복용 시간·복용 이유) 작성
– 약 봉투/라벨 사진을 찍어 기록해도 된다.
– ‘언제부터 먹었는지’, ‘먹고 불편했던 증상’도 함께 적는다. - 중복약·상호작용·불필요 약 확인
– 동일 성분 중복(복제약 포함)
– 어지럼·졸림 유발 약물 중첩(낙상 위험)
– 항응고제-소염진통제 등 위험 조합
– 장기 복용 중인 위장약·수면제·진통제의 필요성 재평가 - 처방 조정(Deprescribing) 원칙 적용
– ‘이 약이 지금도 필요한가?’를 기준으로 우선순위 설정
– 중단이 위험한 약(스테로이드, 일부 항우울제/항불안제, 베타차단제 등)은 의료진 감독 아래 서서히 감량
– 목표는 ‘무조건 줄이기’가 아니라 효과 대비 위험이 큰 약을 정리하는 것 - 약 복용 방식 단순화
– 하루 3~4회 복용을 1~2회로 조정 가능한지 상담
– 복약 순응도(제대로 복용하는지) 개선: 약 달력, 1회 포장, 복약 알림 활용 - 1~3개월 내 재점검 예약
– 약 조정 후에는 혈압·혈당·어지럼·수면 상태 변화를 확인하고, 필요 시 재조정한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환자들이 ‘약을 줄이면 큰일 난다’고 생각해 오히려 부작용을 참고 버티는 경우가 많다’며 ‘브라운백 리뷰는 약을 더 안전하게 쓰기 위한 점검이고, 중복과 위험 조합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낙상·입원 위험을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 코멘트: ‘다제복용은 개인 책임이 아니라 시스템 문제’
노인의 다제복용은 환자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다기관 진료 구조와 정보 단절이 만든 결과라는 평가가 많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여러 과에서 각자 최선의 처방을 하더라도, 전체 처방을 ‘하나의 그림’으로 조정하지 않으면 환자는 약물 부담을 그대로 떠안게 된다‘며 ‘특히 인지기능이 저하된 노인의 경우 약 복용 오류가 겹치면서 위험이 증폭된다’고 지적했다.
노인약료(geriatrics pharmacy) 분야의 한 약사는 ‘약을 줄이는 과정은 ‘중단’보다 ‘대체’와 ‘조정’이 핵심’이라며 ‘예컨대 어지럼을 유발하는 약이 겹치면 하나를 줄이고, 통증은 비약물요법을 병행하는 식으로 안전성과 삶의 질을 함께 보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방 대책: ‘증상’이 생기기 전에 체크해야 한다
전문가들이 꼽는 다제복용 경고 신호는 ▲최근 6개월 사이 약이 늘었다 ▲어지럼·졸림·무기력·식욕저하가 생겼다 ▲최근 낙상·실신이 있었다 ▲복용 시간을 자주 헷갈린다 ▲처방이 2곳 이상에서 나온다 등이다. 다음의 예방 수칙이 권고된다.
- 한 명의 ‘주치의(또는 주치 약사)’를 중심으로 처방 조정
- 병원을 옮기거나 진료과가 늘 때마다 현재 복용약 리스트 공유
- 감기약·진통제·수면유도제 등 일반약을 추가하기 전 약사 상담
- 건강기능식품도 약물 상호작용 가능성을 고려(예: 출혈 위험 등)
- ‘부작용 같아도 참는다’ 대신, 증상을 기록해 약물 재평가 요청
정책 제안: 약물 점검을 ‘표준 서비스’로…성공 사례 확산 필요
현장에서는 개인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 노인 정기 ‘약물 종합검토(Medication Review)’ 수가/제도화
– 일정 연령(예: 65세 이상) & 복용 약물 수 기준(예: 5종 이상)에 대해 연 1~2회 표준 점검 제공
– 의사-약사-간호사(또는 케어매니저) 팀 기반으로 운영 - 처방 정보 통합과 상호작용 경고 고도화
– 의료기관 간 처방 연계 강화
– 동일 성분·동일 계열 중복 및 고위험 조합에 대한 실시간 경고 - 요양시설·재가 돌봄에서의 ‘약물 관리’ 의무화
– 입소/서비스 시작 시 브라운백 리뷰 실시
– 약물 변경 시 보호자·돌봄 인력에게 표준 안내 - 고위험 약물(낙상·섬망 유발 가능 약 등) 관리 지침 확대
– 노인에서 주의가 필요한 약물 목록을 진료현장에 더 적극적으로 반영
– 불가피하게 사용 시 모니터링 기준 명확화
성공 사례: ‘약부터 들여다보니 응급실이 줄었다’
국내 일부 지자체·의료기관에서는 만성질환 관리사업 또는 지역사회 통합돌봄과 연계해 고령층 대상 약물 점검을 시범 운영하며, 중복약 정리와 복약 교육만으로도 어지럼·낙상 위험 요인을 줄이고 불필요한 약물 비용을 절감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해외에서는 약사 주도의 약물 검토 서비스가 다제복용 환자의 약물 관련 문제를 줄이고 입원 위험을 낮추는 접근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이를 지역 1차의료와 결합하는 모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약이 많아질수록 더 자주 점검해야’…고령사회 필수 안전망
다제복용은 현대 의료가 만든 역설이다. 질환을 잘 치료하기 위해 약이 늘었지만, 그 자체가 새로운 위험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노인에게는 ‘처방’만큼이나 ‘처방 조정’이 중요하다’며 브라운백 리뷰와 정기 약물 점검을 일상 의료의 기본 절차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약을 줄이는 것은 치료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치료의 방향을 ‘더 안전하게’ 다시 맞추는 과정이라는 의미다.